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리 애닝 (문단 편집) == 차별 == 그녀의 일생은 지독한 불운과 차별에 가려진 업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데, 그녀는 '''가난한 평민층 침례교 신자 여성'''이란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가구를 만들던 목수였던 아버지가 11살 때 사망한 이후 애닝은 가난한 가족들과 함께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다. 또한 메리의 부모님인 애닝 부부는 [[국교회]][* 현재 성공회의 전신(前身)] 신자가 아니라 회중교회[* 현재 [[침례회]]의 전신(前身)] 신자였다. 국교회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차별이 있던 당시 영국에서 자연스레 메리도 비(非)국교회 신자였던 것이다.[* 종교가 달라도 큰 문제 없이 관용하며 사는 현재의 눈으로는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교파에 의해 차별을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당시 유럽은 자신이 소속된 교파가 민족이나 국적만큼이나 자기 정체성에 깊이 관여되던 시대였다. 물론 차별을 한다는 자체는 당연히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당시는 교파가 다르다는 것이 그런 요인이 되는 시대였다.] 애닝은 이런 불우한 환경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계를 걱정하며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다. 영국은 1828년 비국교도의 차별을 철폐하는 심사법을 제정했으나 사회에서는 아직도 차별이 만연했던 것이었다. 여성이라는 약점도 그녀를 평생 괴롭혔는데, 대부분 [[국교회]]에 소속된 중산층 집단인 젠틀맨 남성들로만 구성되었던 19세기 영국 과학계는, 비(非)국교회 신자이기 이전 평민 여성인 애닝을 그들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애닝은 화석 수집가로서 영국 뿐 아니라, [[유럽]]대륙과 [[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음에도 이런 이유로 런던 지질학회에 가입할 수 없었고, 그녀가 이룬 업적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메리 애닝은 국교회(성공회)로 교파를 옮겼다.] 그녀가 남긴 한 편지에서 당시 그녀가 당했던 차별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세상은 제게 너무나 불친절합니다. 저는 그 때문에 모두가 의심스럽습니다. 메리 애닝이 생전에 과학 저술에서 언급된 것은 단 한 차례였는데, 그것도 애닝이 발견한 사실을 실은 게 아니라, 1839년 《저널 오브 내츄럴 히스토리》가 자신들이 출간한 논문에 의문을 제기한 애닝의 주장을 실은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